예로부터 재자박명(才子薄命)이란 말이 있다. 달리 '미인박명'이라 하기도 한다. 또 팔방미인(八方美人), 끼니를 잇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 정말 그런 것일까? 오늘은
이 말이 담고 있는 뜻에 대해 운명학과 관련지어 알아보기로 한다.
예닐곱 살 무렵, 할머니가 이런 말씀을 해주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인생에는 뭔가 알지 못하는 어둠의 구석이 있구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아마도 이 같은 기억속의 파편(破片)들이 필자로 하여금 운명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만든 먼 배경이 아니었나 싶다.
재자박명이란 말은 '모난 돌이 정(釘)맞는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뭔가 특출한 재주나 용모가 있으면 부러움과 함께 질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명(薄命)하기까지 한 것은 좀 지나치지 않는가.
명이 박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수명이 짧거나 또는 신고(辛苦)의 삶을 산다는 말이다.
미인박명을 떠올리면 그 옛날
정인(情人)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졌던 사람이 생각난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면서 데카당스 가득한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이 바로 그녀이다.
사주(四柱)란 네 개의 기둥이란 말로서 어떤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가리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사주를 보면 그 사람이 타고난 많은 것들을 암시해주고 있다. 쉬운 예로, 겨울에 태어난 사람은 그 한습한 계절의 영향을 받아 성격이 소심하고 웅크리는 면이 나타나고 여름에 태어난 사람은 뜨겁고 건조하여 화급(火急)한 성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사람이 왜 그런 사주로 태어나서 그런 성미를 지니는 지, 가장 큰 원천은 부모와 조부모의 성향에서 온다. 부모가 재주 있으면 자식도 재주를 잇는 법이고, 더러는 조부모의 특이한 개성을 이어가기도 한다.
그렇기에 많은 수련을 통해 사주를 보면 그 사람에게 빼어나고 수려한 기운이 있는지를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미인이나 재자(才子)란 그런 기운이 타인에 비해 특출한 자를 일컫는 말이다.
옛 사람들은 사생(死生)과 수요(壽夭), 부귀(富貴)와 빈천(貧賤)이 하늘에 달린 것이라 믿었었다. 여기서 '하늘'이란 이미 그렇게 타고난 바를 일컫는 것인데 오랜 경험과 상담을 통해 필자 역시 그 말이 헛되지 않음을 검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로 이런 말은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타고났다고 해서 부귀나 장수가 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사주를 본다는 것은 노력하는 성격인지, 기본적인 체질이 튼튼한지, 그리고 재주가 있는지, 있다면 어떤 방면에 재주가 있는 것인지를 보는 것이고, 그런 것이 살아가면서 시운(時運)과 부합하는지를 판별하는 일에 불과하다.
건강한 체질과 근성, 거기에 재주가 있다면 반은 성공을 약속한 것이며 이에 시운마저 따른다면 필연코 좋은 결과가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절반의 성공을 기약한 자는 운이 따르지 않아도 역시 범상치 않은 기개를 지니는 법이다.
따라서 미인박명 또는 재자박명이란 결국 그 근본이 뛰어난 자를 일컫는 것이라 절반의 성공을 기약하고 태어났으나 시운이 그 재주를 후원하지 않아 완성을 보지 못하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여기 필자의 기억 속에 두고두고 남아있는 한 아주머니의 사주를 보기로 하자.
연 갑신(甲申)
월 임신(壬申)
일 신유(辛酉)
시 병신(丙申)
이미 세상을 뜬 지 오래 된 분이다. 신금(辛金)이 신월(申月)에 나니 에너지가 대단히 강하고 월에 임수(壬水)가 있어 이른바 상관을 용신(用神) 삼는 운명이다. 용모가 대단히 빼어나고 늘씬하며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분이었으며 특히 그 기상이 한 세상을 풍미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업하던 부군이 안타까이 세상을 떠나자 그 사업을 이어받아 더 크게 발전시켰다. 돈도 있고 용모도 출중하니 여러 남자들이 접근해오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곁눈 한 번 팔지 않고 사업에 매진하다가 그만 간암(肝癌)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상을 뜬 해가 지난 2000년 경진(庚辰)이었다. 1998년 당시 필자는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계기에 팔자를 봐주게 되었다.
간(肝)기능에 문제가 있으니 너무 사업에만 몰두하지 말고 몇 년 정도 쉰다는 마음으로 지내면서 몸을 돌보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해 준 적이 있었다.
나중에 그 분의 사망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필자가 추산해보니 1999년 기묘(己卯)년 9월 계유(癸酉)월에 간암이 발생했던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얘기로는 간암 판정을 받은 것이 그 해 세모 무렵이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 재주가 뛰어나고 능력이 출중했으나 시운이 받쳐주질 않아 예순을 못 채웠으니 미인박명의 예라 하겠다.
미인박명이란 말은 반드시 여성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주유가 제갈량을 시기한 끝에 가슴에 병이 들어 요절한 것도 역시 미인박명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을 두고 하는 말로 알려져 있는 것 같다. 특히 용모가 아름다운 여성이 박복하거나 힘든 삶을 이어갈 경우 그런 말을 한다.
여성의 경우, 용모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용모 이외의 다른 것이 얼마나 받쳐주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천차만별이다. 빼어난 용모이건만 그것으로서 몸을 파는 여성이 있으니 그 얼마나 싸구려 인생인가. 반면 학식과 배경을 갖추면 용모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되어 그 값을 실로 매길 수가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론을 말하면 미인은 박명(薄命)하지 않다. 다만 빼어난 사람이 잘 풀리지 않거나 일찍 세상을 떠나면 기억에 선연하게 남기에 미인박명이란 말이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나아가서 용모와 재주가 뛰어난 미인일수록 장수하고 부귀할 가능성은 훨씬 높다는 것이 운명학의 견지에서 필자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얻은 생각이다.
다만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단순한 철리를 잊진 말아야 하겠다.
부(富)하고 귀(貴)하며 수(壽)하고 복(福)이 있으며 재(才)마저 갖춘 운명은 확률적으로 따져도 10만분의 1에 불과하며 이에 부모나 자녀마저 두루 잘 되는 삶은 사실상 로또복권보다 더 어렵다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 모든 것을 갖추지 않아도 아름다운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니 그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보배가, 그것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지닐 수 있는 보배가 이미 주어져있기 때문이다.
그 보배가 뭔고 하니 이름 하여 자족(自足)이라 한다.
산다는 것은 어떤 견지에서 보면 자족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익히게 되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갈고닦은 그 보배를 가지고 늘그막의 세월을 유유하게 지낼 수 있으면 더 이상 무엇을 아쉬워하겠는가.
이야말로 '지는
노을이 한 없이 아름답다'는 석양무한호(夕陽無限好)의 경지인 것이다. 여기서 석양이란 인생의 노년을 뜻하는 말이다.
당대(唐代) 이상은의 '등낙유원'에 있는 구절이다.
'저녁 무렵 울적하여 차를 몰아 높은 언덕에 올랐네, 지는 해가 한 없이 좋으니 그저 황혼이 가깝구나.'
재자박명에 관해 글을 쓰다보니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다.
필자가 평소 천금같이 아끼고 수시로 가까이하는 동아시아의 고전문학으로 '구운몽(九雲夢)'과 중국 청나라 시절에 나온 '부생육기', 그리고는 당시(唐詩)가 있는데, 작년에 주옥을 하나 더 얻었다. 베트남의 고전문학인 취교전(翠翹傳)이다.
취교전은 바로 재자박명을 주제로 하여 만들어진 소설인데, 베트남의 춘향전이라 할 수 있다. 베트남어를 모르니 원래의 맛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문화적 정수와 풍부한 디테일들로 가득차있어 읽을수록 재미를 더한다. 참고로 이 책은 국내의 소명출판이란 곳에서 번역 출판하였음을 알려드린다.
취교전을 보면 서막을 장식하는 시 한편이 미인박명과 연관이 되어 소개하면서 마친다.
"사람의 한 평생 백년을 넘지 못하건만
재(才)와 명(命)은 이상하게도 서로 미워한다네.
한바탕 상해(桑海)속에서
여러 일들 보노라니 가슴이 아파오네.
이것이 박하면 저것이 후한 것은 이상할 것 없으니,
창천(蒼天)은 홍안(紅顔)을 시기하여 괴롭히는 버릇이 있다네."